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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겁의 인류 역사가 켜켜이 쌓여 내려온 고장 양주

  • 안홍필 기자
  • 입력 2026.04.22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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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 개막식

 

【컨슈머저널 취재본부/안홍필 기자】 양주시 언제부터 인간이 살았는지는 명확하게 언급할 수 없다. 그러나 고고학에서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류의 시작은 인간과 가장 가깝다고 알려진 침팬지류와 분류된 700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을 시작으로 여러 종을 거쳐 현생 인류라 할 수 있는 호모 사피엔스로 이어지며 석기시대에 접어든다. 석기시대는 구석기와 신석기로 나눠지고 진화하는 과정에서 아프리카에서 기원해 유럽으로 전파되었으며 아시아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던 고고학계 정설을 깨는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양주시 인근인 한반도 정중앙 한탄강 일대인 연천군 전곡리 유적지에서 발견 고고학자들의 발굴 과정을 통해 구석기 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로인해 한반도 역시 인류의 태동이 함께한 역사의 지역이 된다. 이는 양주시가 강원도에서 발원하여 서해로 흐르는 한강과 북한에서 발원하여 한강과 만나 서해로 흐르는 임진강, 북한에서 발원해 임진강과 만나는 한탄강을 사이에 둔 지역으로 풍부한 수량과 넓은 평야 지대로 인해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가진 곳으로 이를 뒷받침하듯 은현면 용암리에서 다각면원구(多角面圓球)와 긁개 등 구석기 유물이 발견되기로 한다. 

다만 구석기인들의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집터나 이와 유사한 형식의 유적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옛 양주시 북부인 전곡리와 동두천시 하봉암동, 남부인 의정부시 민락동, 서울 북부의 면목동, 1980년까지 양주군에 속했던 남양주시의 화도읍 검터, 와부읍 송촌리·진중리·능내리, 호평동 등에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고 있는 양주지역으로 한반도 중심에 위치한 지역적 특성에 따라 서울 북부를 시작으로 의정부, 남양주, 동두천, 연천 등과 같이 구석기시대 유물과 유적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어 국내는 물론 세계사와 관련된 고고학계에서도 구석기 연구를 위한 관심은 물론 주목할 지역이 되었다. 
 

 

4.19.-[포토] 도심 한복판 왕의 귀환…제9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 어가행렬 눈길1.jpg
제9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 어가행렬

 

양주란 지명 유래가 명확하지는 않으나 고구려시대(475년 이후) 광개토대왕의 백제 정벌 후 한강 이북 지금의 경기북부 일대가 '매성'으로 불렀으며, '창화'라고도 불린다. 통일신라 경덕왕(757) 매성군을 '내소군'으로 개편했다가 고려시대 태조(940) 때 '견주군(見州郡)'으로 불리다 성종 2년(983) 전국에 12목을 설치할 시기에 한양군(현재 서울 강북 일부) 지역을 중심으로 양주목(楊州牧)을 두면서 양주란 지명이 이때 문헌상에 나타난다. 이후 교통로의 중심이 개경 중심으로 바뀌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며 12목이 8목으로 개편될 때 견주군을 견주현으로 격하시켜 양주목의 ‘양’과 광주목의 ‘광’을 딴 양광도에 소속되기도 한다. 


양주와 견주는 경주에서 평양으로 향하는 교통의 요지로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 속의 양주시는 고려시대 현종 9년(1018) “경기도”가 경기라는 지명이 부여되었을 때부터 현종은 "이 지역은 버드나무가 무성히 자랐다"는 의미로 '버들고을' 이라고 부르면서 '양주(楊州)'로 지명을 정했다는 설도 전해지기도 한다. 이후 문종 21년(1067) 양주의 중심지(현 서울 광진구 일대)에 부수도인 남경을 설치한다. 숙종 시기 남경의 범위가 풍양현(남양주), 견주(양주/의정부), 사천현(동두천)까지 직할로 두어 넓혀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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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시의 역사를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와 현대로 나눠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 가운데 양주 지역 일대를 제일 처음으로 확보한 국가는 백제였다. 일찍이 백제 최초의 도읍지였던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양주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백제 개루왕(蓋婁王) 5년인 132년에 북한산성을 쌓았고, 제21대 개로왕(蓋鹵王) 15년인 469년 10월에 북한산성에 병사를 주둔시켰다’라고 하고 있다. 이는 마한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한 백제가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실시되는 5세기 중반 이전까지 양주 지역을 자기 세력권 아래에 두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이곳은 백제에 이어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당시 고구려는 현재의 양주시 일대를 매성(買城)[혹은 매성(買省)이라고도 씀] 혹은 마홀(馬忽)로, 은현면과 동두천시 일대를 내을매(內乙買) 혹은 내이미(內爾米)라고 불렀으며, 남면 일대는 칠중성(七重城), 남양주 일대는 골의노현(骨衣奴縣)이라 불렀다. 양주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는 한강을 경계로 백제와 대치하는 제일선인 양주 지역에 각종 군사 시설을 만들면서 이곳의 이름을 매성(買城)이라고 불렀다. 원래 ‘매성’이란 고구려말로 ‘맷골’ 혹은 ‘물골’로서 수성(水城)을 의미한다. 그런데 매성군은 매초성(買肖城)과 통하며, 신라가 통일을 완성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던 매초성이 바로 지금의 양주 지역이었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현재까지도 매초성이 어딘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연천의 호로고루성(瓠蘆古壘城) 부근 혹은 대전리산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로 『삼국사기』와 『신당서(新唐書)』에는 당시 당나라 장수 이근행(李謹行)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매초성에 주둔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호로고루성이나 대전리산성 등 조그만 성에 20만 대군이 주둔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매초성은 규모가 큰 성일 수밖에 없고, 그런 성은 경기 북부에서 불곡산과 천보산, 그리고 지금의 칠봉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양주시 회천동·양주동 일대 밖에는 없다. 따라서 현재의 양주시 지역은 삼국시대 매초성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부터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지 89년이 지난 757년(경덕왕 16)에는 매성을 내소현(來蘇縣)으로, 내을매를 사천현(沙川縣)으로, 골의노현을 황양(荒壤) 혹은 풍양(豊壤)으로 바꿔 불렀다. 현재 양주시 유양동과 어둔동, 백석읍 오산리에 걸쳐 있는 양주 대모산성(大母山城)에서 출토된 백제 토기 편과 신라와 통일신라의 유물들, 그리고 천보산과 불곡산·도락산 일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군사용 보루 유적을 포함한 관방 유적들은 양주 지역이 아주 중요한 전략적인 요충지였음을 입증해 준다. 

 

18세기 제작한 동여도(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강원도로 가는 요충지.jpg
18세기 제작한 동여도(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강원도로 가는 요충지

 

[고려시대] 

후삼국 시대까지 아직 ‘양주’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았다. ‘양주’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고려 초기, 현재의 양주시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북한산과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 즉 현재의 서울 사대문(四大門) 안쪽 일대를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양주라는 이름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처음 등장한다. 413년(신라 실성왕 12)에 평양주(平壤州)에 큰 다리가 완성되었다고 하면서, 평양주는 지금의 양주(楊州)를 가리킨다고 했다. 즉 고려시대의 양주는 삼국시대에 평양주로 불렸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평양주는 당시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에서 남평양주(南平壤州)를 가리킨다. 고려시대의 양주는 삼국시대 당시 북한산 일대에 조성된 행정구역이라 하여 북한산주(北漢山州), 혹은 한강 이북에 있다 하여 한양군(漢陽郡)으로 불렸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후백제의 견훤이 장자 신검의 반란에 직면한 후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했을 때, 왕건은 개경에서 후한 예로 맞이하고 양주를 식읍(食邑)으로 하사하였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가 기록된 고려 인종 때의 인식에 근거하여 양주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후삼국 시대가 지나고 고려 왕조가 개창되면서 비로소 ‘양주’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고려사(高麗史)』에는 755년(경덕왕 14)에 북한산주를 한양군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다시 양주로 고쳤다고 한다. 고려 초기란 태조 왕건의 집권기를 가리키는 940년(태조 23)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성하면서, 한양군을 양주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양주는 발전을 거듭하여 983년(성종 2)에는 지방의 12개 주요 거점 도시를 의미하는 12목(牧)의 하나로 편성되었고, 1067년(문종 21)에는 남경(南京)을 설치하여 인접 군민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다. 뿐만아니라 숙종 때에는 수도를 개경에서 남경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즉 1096년(숙종 원년)에 신하 김위제(金謂禔)가 양주에 목멱양(木覓壤)이 있는데 수도로 정할만 하다고 하면서 수도를 남경으로 옮길 것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이때 천문 담당 관리인 문상(文象)이 김위제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양주에 새로운 궁궐을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1010년(현종 1)에는 물밀듯 쳐들어오는 40만의 거란병을 피해 왕이 개경을 버리고 멀리 나주까지 몽진할 때, 양주에 며칠간 머문 일도 있다. 당시 남진하던 거란군이 장단에 이르렀을 때 이곳의 서북단 천험의 요새지 감악산에 군대의 정기(旌旗)와 군마가 있는 것 같이 보여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하고 퇴각하게 한 사실을 기록한 완문(完文)[관에서 개인에게 발급하는 문서]이 감악산 사당(祠堂)에 전해온다. 1012년 양주의 절도사가 폐지되고 안무사로 개편되었으며, 1018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되었고 견주(見州)·사천현(沙川縣)[지금의 동두천시, 양주시 회천동·은현면 일원)·풍양현(豊壤縣)[지금의 남양주시 진건면·진접읍 일원]이 양주의 속현이 되었다. 

1099년(숙종 4) 가을 숙종은 직접 양주에 가서 궁궐터를 정하고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와 지주사(知主事) 윤관(尹瓘)에게 명하여 남경 건설 공사를 감독하도록 했다. 공사는 5년 만에 끝났고, 숙종은 현장을 직접 확인했다. 1308년(충렬왕 34)에는 이곳의 이름을 한양부(漢陽府)로 고친다. 이후 양주라는 이름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고 이 지역을 가리키는 별칭으로 계속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쳐 양주는 지금의 양주군이 아닌 현재의 서울 중심지를 가리키는 명칭이었고, 현재의 양주시 지역 일대는 견주로 불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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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지방지도(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1392년 새롭게 조선 왕조를 개창했다. 이성계는 고승 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전국 각지를 찾아다니며 새로운 수도를 물색한다. 그 결과, 이성계는 고려 후기까지 ‘양주’로 불리던 한강 북부의 한양부가 정치·경제·군사적 측면에서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수도로 선정했다. 한편, 새로운 수도가 한양부에 설치되자, 한양부 가운데 수도에 편제되지 않은 지역은 옛 양주를 계승하는 지역이라 하여 그대로 ‘양주’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양주의 중심지도 오늘날의 양주시 일대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자세히 실려 있다. 『태조실록(太祖實錄)』 4년[1395] 6월 6일조를 보면, 한양부를 고쳐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기존의 아전과 백성들을 견주, 즉 현재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옮기고 행정 구역명을 양주군(楊州郡)으로 고쳤다고 전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 사실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실려 있다. 즉 1394년(태조 3)에는 도읍을 한양부에 정하였으며, 기존의 한양부 치소(治所)를 일단 동촌(東村) 대동리(大洞里)[현재의 서울시 광진구 구의동 일대]에 옮기면서 관직을 지양주사(知楊州事)로 강등시켰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과 함께 양주군으로 강등되었던 양주 지역은 1395년에 양주부(楊州府)로 승격하였고, 1397년에는 치소를 견주 지역, 즉 현재의 양주시 고읍동 일대로 이전했다. 1413년(태종 13)에는 양주도호부(楊州都護府)로, 다시 1466년(세조 12)에는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이는 양주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인데,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는 양주가 목(牧)으로 승격된 배경이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이 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제기하기도 했다. 

 

4.19.-[포토] 도심 한복판 왕의 귀환…제9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 어가행렬 눈길2.jpg
왕의 귀환…제9회 양주 회암사지 왕실축제 어가행렬

 

한편, 1403년(태종 3) 11월 19일조의 기록을 보면, 양주부를 양원(楊原)이란 이름으로 고칠 것을 건의했다는 기사가 나오는데, 실행되지는 못했다. 한편, 양주는 조선 중기에 들어 한 때 존폐의 위기에 놓이기도 한다. 1504년(연산군 10)에 경기 북부 지역에 강무장(講武場), 즉 국왕의 무예 연마를 위한 공식 수렵장을 조성한다. 그리고 일반인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금표(禁標)를 설치했다. 당시 양주 지역의 대부분이 금표 지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연산군은 이어 양주목의 백성들을 인접 지역으로 이주시키도록 함으로써 사실상 양주목이라는 행정구역을 소멸시켰다. 그러나 1506년(중종 원년)에 양주는 양주목으로 다시 부활되었다. 그리고 치소는 현재의 양주시 유양동의 불곡산 부근에 새로 조성했다. 이때부터 유양동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양주 시대가 열렸으며, 기존의 양주시 고읍동 지역은 일개 마을로 전락한다. 동헌과 더불어 향교와 사직단, 그리고 각종 건물들이 이때 조성되었다. 양주 지역에 있는 게너미고개[해유령]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원수 신각(申恪)과 유도대장 이양원(李陽元), 함경도병마절도사 이혼(李渾) 등이 육지 전투에서는 최초로 전승을 거둔 전첩지이기도 하다. 


또한, 현종 재위 당시 남편을 죽인 애상(愛相)이란 여자가 자복하고 처형됨으로써 목(牧)에서 강등될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대로 능침(陵寢)이 있는 고을이라 하여 강등시키지 않고, 양주목사를 파직시키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한다. 이것은 조선 왕조에서 양주를 얼마나 중요한 지역으로 취급하고 있는지를 알려 주는 명확한 자료이다. 한편,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輿地圖書)』[1757~1765]에서는 양주목을 ‘지금 학성(鶴城)이라고 칭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전후의 어느 문헌에서도 보이지 않는 독특한 이름이어서 주목된다. 양주목의 면 단위 행정 구역명은 18세기 중반의 문헌인 『여지도서』에서 처음 확인된다. 그리고 양주목의 리 단위 행정 구역명은 18세기 후반의 문헌인 『호구총수(戶口總數)』[1789]에서 처음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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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양주군 청사 전경

 

[근대] 

19세기 말에 들어 조선의 지방 행정 구역은 크게 변화되었다. 즉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따라 지방 제도 개정 사항이 전국에 반포되었다. 당시 양주목은 경기 소속의 3등군(三等郡)인 양주군으로 변경되었다. 1922년 군청사가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시둔면 의정부리[지금의 의정부시]로 이전됨에 따라 시둔면은 1938년에 양주면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 : 태조 4년 (1395) : 양주군(楊州郡)으로 개칭되었다. 세조 12년(1466) 양주목(楊州牧)으로 승격했다. 중종 시기 읍치를 현 유양동 자리로 이전했다. 고종 32년(1895) 23부제 시행으로 한성부 양주군으로 재편되고,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 두모방에 편입되었다가 고종 33년(1896) 전국 13도제 개편에 따라 경기도 양주군으로 재편되었다. 고종 43년(1906년 9월 24일) 신혈면이 고양군에, 산내면과 청송면이 포천군에 이관되었고, 광주군 초부면을 편입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4월 1일 부군면 통폐합으로 고양주면이 고양군에, 영근면이 연천군에 이관되었고, 면·리가 통폐합되었다.
-1915년 광주군 동부면 팔당리를 와부면 봉안리에 편입했다.
-1922년 10월 1일 양주군 청사를 시둔면 의정부리(현 의정부시 의정부동)로 이전했다.
-1938년 1월 1일 시둔면을 양주면으로 개칭했다.
-1942년 10월 1일 양주면이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대한민국 1946년 2월 5일 파주군 남면을 편입했다.
-1962년 12월 12일 노해면이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구리면 일부(망우리, 묵동리, 상봉리, 신내리, 중하리)가 동대문구로 이관되었다.
-1963년 1월 1일 의정부읍이 의정부시로 승격·분리되었으며, 이담면이 동두천읍으로 승격하였고, 화도면 일부와 진접면 일부, 가평군 외서면 일부가 통합되어 수동면이 신설되면서 구리면, 미금면, 별내면, 수동면, 와부면, 진건면, 진접면, 화도면이 월경지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 구리면이 구리읍으로 승격하였고, 포천군 포천면 탑동리가 동두천읍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미금면이 미금읍으로 승격하였다.
-1980년 4월 1일 구리읍, 미금읍, 별내면 일부, 수동면, 와부면, 진건면, 진접면, 화도면이 남양주군으로 신설·분리되었고, 별내면 고산리·산곡리가 의정부시로 이관되었다.
-1981년 7월 1일 동두천읍이 동두천시로 승격·분리되었다.
-1983년 2월 15일 백석면 영장리·기산리가 파주군 광탄면으로, 은현면 상패리가 동두천시로 이관되었다.
-1985년 10월 1일 회천면이 회천읍으로 승격했다.
-2000년 9월 25일 양주군 청사를 주내면 남방리(현 남방동)로 이전되었다.
-2000년 10월 1일 주내면이 양주읍으로 승격했다.
-2001년 10월 1일 백석면이 백석읍으로 승격했다.
-2003년 10월 19일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했다.(도농복합시)
-2023년 10월 23일 회천4동을 옥정1동, 옥정2동으로 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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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현재 그리고 미래
2003년 양주군은 마침내 양주시로 승격되며 도농복합도시로 새롭게 출발한다.
최근에는 옥정·회천 신도시 개발을 통해 수도권 북부의 핵심 주거지로 성장하고 있으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로 변모하고 있다. 선사시대 인류의 흔적에서 시작해 삼국의 격전지, 고려와 조선의 정치 중심, 그리고 현대 도시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이곳은 늘 ‘사람이 모이고 떠나는 길목’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양주시 역사의 시간은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계속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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