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들은 그를 원대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그의 마음속에는 또 하나의 이름이 살고 있었다.
‘원정민’
먼 길을 떠나는 사람, 바른 뜻을 세우는 사람, 백성과 함께 걷는 사람. 그는 그 이름을 생각할 때마다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이 한 줄로 이어지는 듯했다.
그의 고향은 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진상2리 5반, 대직방 마을이었다. 마을 앞에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멀리 임진강이 굽이쳐 흘렀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강 위에 내려앉았고 저녁이면 노을이 강물을 붉게 물들였다.
어린 원정민은 책가방을 메고 왕산초등학교에 다녔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임진강을 건너야 했다. 강 위에는 사람들에게 ‘화이트교’라고 불리던 다리가 놓여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다리 위로 강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겨울이면 손이 얼고 볼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아이들은 다리 위에서 뛰며 장난을 쳤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물을 보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외쳤다.
“임진강아, 우리가 간다!”
원정민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강물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궁금했다. 어른들은 임진강이 남과 북을 가르며 흐른다고 했다. 그러나 어린 정민의 눈에는 강이 사람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먼 세상으로 길을 내주는 것처럼 보였다.
“강물은 국경을 모르잖아.”
정민이 혼잣말처럼 말하자 옆에서 걷던 친구가 웃었다.
“강물이 어떻게 국경을 알아?”
정민도 따라 웃었다. 그러나 그 말은 오랫동안 그의 가슴속에 남았다.
왕산초등학교 교실에서는 국어와 산수뿐 아니라 한자도 조금씩 배웠다. 선생님이 칠판에 ‘天’을 쓰고 하늘 천이라고 읽으면 정민은 글자 모양을 한참 바라보았다.
하늘을 뜻하는 글자가 왜 저런 모양일까. ‘川’은 왜 흐르는 물처럼 생겼을까. ‘人’은 왜 사람이 서로 기대어 서 있는 것처럼 보일까.
한자는 정민에게 그림이면서 이야기였다. 글자 하나에 수백 년, 수천 년 동안 이어진 생각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그는 어른이 되었다. 세상은 빠르게 변했다.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휴대전화 화면을 움직이며 수많은 정보를 접했지만, 정작 교과서와 신문에 나오는 단어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어느 날 정민은 한 학생이 안내문을 읽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았다.
“선생님, ‘입장 제한’이 무슨 뜻이에요?”
“들어가는 것을 일정하게 막는다는 뜻이지.”
“그런데 왜 그냥 ‘못 들어간다’고 쓰지 않았어요?”
정민은 대답하려다가 잠시 멈췄다. ‘입장’의 입은 들 입(入), 장은 마당 장(場)이었다. ‘제한’의 제는 억제할 제(制), 한은 한계 한(限)이었다. 한자의 뜻을 알면 문장의 의미가 자연스럽게 이어졌지만, 글자의 뿌리를 모르는 학생에게는 네 음절로 된 낯선 암호와 같았다.
한국어 어휘의 상당 부분이 한자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생들은 한글을 읽을 수 있었지만 단어 속에 들어 있는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 정민은 그것이 안타까웠다.
“한글은 우리의 위대한 소리글자다. 그렇지만 우리말 속에는 오랜 세월 한자와 함께 만들어진 뜻이 들어 있다. 한글이라는 날개와 한자라는 뿌리를 함께 알아야 더 높이 날 수 있는데…….”
그날 밤 정민은 낡은 천자문 책을 꺼냈다.
天地玄黃 宇宙洪荒.
日月盈昃 辰宿列張.
“천지현황 우주홍황, 일월영측 진수열장.”
그는 소리 내어 읽었다. 천 자가 각각 한 번씩 사용되는 천자문은 거대한 글자의 숲과 같았다. 그러나 기존의 방식대로 한 글자씩 쓰고 외우는 것은 학생들에게 너무 어렵고 지루했다.
‘천 자를 노래처럼, 이야기처럼 통째로 기억할 수는 없을까?’
정민은 천자문을 여덟 글자씩 나누어 보았다. 여덟 자씩 125구, 모두 1,000자였다. 여덟 글자는 짧은 노래가 되고, 장면이 되고, 하나의 기억 덩어리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손뼉으로 박자를 맞추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앞의 네 글자와 뒤의 네 글자가 한 호흡으로 이어졌다. 그는 다시 박자를 바꾸어 읽고, 걸으면서 외우고, 손동작을 붙였다. 글자의 뜻을 그림으로 바꾸고, 그림을 이야기로 연결했다. 하늘과 땅이 열리고, 해와 달이 움직이며, 별들이 밤하늘에 줄지어 서는 모습을 상상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자 125개의 구절이 머릿속에서 하나의 긴 강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 연천에서 시작한 천 자다. 여덟 자씩 125구를 연결하여 천 자를 통째로 익히는 방법. 이름을 ‘연1000 천자문’이라고 하자.”
‘연’은 연천의 연이면서 사람과 사람, 글자와 글자, 과거와 미래를 연결한다는 뜻이었다. 1000은 천자문의 천 글자이자 천 가지 가능성을 상징했다.
정민은 사람들이 천자문을 눈으로만 보지 않고 몸으로 경험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천자문 암송에 카드와 음악, 손동작과 이야기를 결합한 ‘연1000 천자문 마술공연’을 준비했다.
공연이 시작되면 흩어진 한자 카드가 그의 손끝에서 순서대로 나타났다. 관객이 임의로 고른 숫자를 말하면 정민은 그 순서에 해당하는 천자문 구절을 암송했다. 아이들이 글자 카드를 섞어 놓아도 그는 앞뒤 문장을 찾아 하나로 연결했다.
“천자문은 지루한 옛날 공부가 아닙니다. 천 개의 글자가 펼치는 천 개의 이야기입니다.”
정민은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첫 번째 큰 공연을 열었다. 수십만 년 전 사람들이 주먹도끼를 만들었던 땅에서 천 년 이상 이어진 글자의 지혜를 선보이는 자리였다.
그는 무대에 주먹도끼 모형과 한자 카드를 함께 올려놓았다.
“주먹도끼는 사람의 손이 만든 생존의 도구였습니다. 문자는 사람의 생각이 만든 기억의 도구입니다. 도구를 가진 인간이 역사를 만들었듯이 문자를 이해하는 사람이 미래를 만듭니다.”
한 학생이 무대로 올라와 카드 한 장을 뽑았다. 카드에는 ‘學’자가 적혀 있었다.
“무슨 글자일까요?”
“배울 학이요.”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학생은 한참 생각한 뒤 대답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요.”
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배움은 외우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글자의 뜻을 알고 그것을 자기 삶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관객들의 박수가 선사유적지에 울려 퍼졌다. 아주 오래전 돌을 깨뜨리던 소리와 오늘날 글자를 깨우치는 소리가 서로 만나는 것 같았다.
당포성 별빛축제의 밤에도 연1000 천자문 마술공연이 열렸다. 성벽 위로 별이 쏟아지고 임진강 물결 위에 달빛이 흔들렸다.
정민은 별빛 아래에서 천자문을 암송했다.
“일월영측, 진수열장!”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별자리가 넓게 펼쳐진다는 구절이었다. 관객들은 일제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글자 속에 있던 해와 달과 별이 당포성 하늘에서 다시 살아났다.
정민은 어린 시절 화이트교를 건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 바라보았던 임진강과 별빛이 지금 천자문의 문장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뒤 한 아이가 찾아왔다.
“선생님, 저도 천 자를 외울 수 있을까요?”
“그럼. 처음부터 천 자를 보지 말고 오늘은 여덟 자만 친구로 만들어 보렴. 여덟 자가 열 번 모이면 80자이고, 그런 걸 계속 연결하면 어느 날 천 자가 네 안에서 하나의 노래가 될 거야.”
“천 자를 모두 외우면 무엇이 좋아요?”
정민은 아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한자를 많이 아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단다. 글자의 뜻을 알면 세상이 하는 말을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어.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말을 이해할수록 네 생각도 더 깊어진단다.”
그날 이후 연1000 천자문은 학교와 마을, 축제와 문화행사로 조금씩 퍼져 나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방법을 반긴 것은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 천자문 암기가 무슨 소용입니까?”
“아이들에게 낡은 공부를 강요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암기는 창의력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정민은 그 말을 피하지 않았다.
“뜻도 모르고 반복하는 암기라면 고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1000 천자문은 글자를 그림과 노래, 역사와 언어로 연결하는 기억법입니다. 기억은 생각의 감옥이 아니라 생각을 멀리 보내는 디딤돌입니다.”
그는 천자문을 중국어와 일본어 학습에도 연결해 보았다. 같은 글자라도 한국에서는 다르게 읽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또 다른 소리로 읽었다. 정민은 그 차이를 비교하면서 한 글자가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잇는 문화의 다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어린 시절 건너던 화이트교가 떠올랐다.
‘다리는 두 땅 가운데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다. 양쪽을 이어 줄 때 비로소 다리가 된다. 천자문도 과거와 미래, 한국과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될 수 있다.’
정민의 꿈은 더욱 커졌다.
천자문 1,000자를 한국어뿐 아니라 중국어·일본어·영어·스페인어·포르투갈어·프랑스어·독일어·아랍어·몽골어 등 열 가지 언어로 익혀 모두 1만 자의 소리와 뜻을 연결하는 일이었다.
그는 그 계획에 ‘만자 천자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언젠가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을 걸으며 만자 천자문을 암송하겠다고 다짐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수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의 소망을 품고 걷는 길이었다. 그 길에서 천자문을 열 가지 언어로 암송한다면 세계인에게 한국의 기억문화와 한글·한자의 조화를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몇 년 뒤 정민은 마침내 스페인 땅에 섰다.
등에는 태극기가 달린 배낭을 메고 가슴에는 ‘K-천자문, YEON 1000’이라고 적힌 표지를 달았다. 손에는 125개의 구절이 표시된 순례 지팡이를 들었다.
첫날 그는 한국어로 천자문을 암송하며 걸었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둘째 날에는 중국어 음으로 읽었고 셋째 날에는 일본어 음으로 이어 갔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처음에는 낯선 동양의 글자와 소리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프랑스에서 온 순례자가 물었다.
“당신은 주문을 외우고 있습니까?”
정민이 웃으며 대답했다.
“주문이 아니라 천 년을 건너온 지혜입니다. 하늘과 땅, 해와 달, 부모와 자식, 배움과 우정, 자연과 인간에 관한 천 개의 글자입니다.”
“그 많은 글자를 어떻게 기억합니까?”
정민은 지팡이에 표시된 여덟 개의 작은 점을 보여 주었다.
“여덟 글자를 한 장면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125개의 장면을 하나의 길로 연결합니다. 사람은 무의미한 글자를 오래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야기가 된 글자는 잊지 않습니다.”
그날부터 몇몇 순례자가 정민과 함께 걸었다. 스페인 사람은 천지현황을 스페인어 의미로 말했고, 일본 사람은 일본식 음으로 읽었다. 중국 청년은 중국어 발음을 알려 주었고, 브라질에서 온 여성은 포르투갈어로 하늘과 땅을 노래했다.
순례길 위에서 천자문은 어느 한 나라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뜻을 나누는 평화의 문장이 되었다.
그러나 피레네를 넘고 갈리시아의 비바람을 지나면서 정민의 무릎은 점점 아파졌다. 산티아고를 불과 사흘 앞둔 날, 그는 길가의 돌 위에 주저앉았다.
‘여기서 멈춰야 하나?’
그때 함께 걷던 스페인 소년이 다가왔다. 소년은 정민의 공연을 보며 천자문의 첫 구절을 배운 아이였다. 소년이 서툰 한국말로 외쳤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뒤따르던 순례자들도 저마다의 발음으로 같은 구절을 외쳤다. 열 나라의 소리가 들판 위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정민은 지팡이를 짚고 다시 일어섰다.
“그래. 암기는 혼자 기억하는 일이 아니야. 서로의 기억을 이어 주는 일이야.”
마침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 앞 광장에 도착한 날, 수많은 순례자가 원을 그리며 모였다. 원정민은 원의 한가운데 섰다.
그는 왕산초등학교 교정과 화이트교, 임진강의 물안개, 전곡리 선사유적지의 주먹도끼, 당포성의 별빛을 차례로 떠올렸다. 자신이 걸어온 모든 길이 바로 이 광장으로 이어진 것 같았다.
그는 태극기를 펼쳐 들고 마지막 구절을 암송했다.
“위어조자, 언재호야.”
마지막 글자가 끝나는 순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힘찬 박수를 보냈다. 누군가는 대한민국을 외쳤고 누군가는 한글을 외쳤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천자문의 뜻을 말하며 서로 손을 잡았다.
정민은 마이크를 들었다.
“저는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의 작은 마을에서 자랐습니다. 어린 시절 임진강의 다리를 건너 학교에 다녔고, 전곡리 선사유적지에서 천자문 천 자를 통째로 기억하는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오늘 저는 그 천 자를 열 가지 언어로 연결하여 1만 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한글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위대한 문자입니다. 한자는 오랜 역사와 생각을 담아 온 뜻글자입니다. 우리는 어느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글의 과학성과 한자의 뜻을 함께 배울 때 우리말을 더 깊이 이해하고 세계의 언어와도 더 넓게 만날 수 있습니다.
K-천자문은 과거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아닙니다. 오래된 지혜를 오늘의 기억법과 연결하여 미래로 나아가자는 문화운동입니다.”
광장 위로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펄럭였다.
그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한국의 학생들은 휴대전화 화면을 통해 연1000 천자문을 따라 읽기 시작했다. 연천 왕산초등학교 학생들도 교실에서 여덟 글자씩 힘차게 외쳤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그 소리는 교실을 나와 임진강을 건너고, 당포성의 별빛을 지나, 산티아고 순례자의 길까지 날아갔다.
원정민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 화이트교 위에서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강물은 국경을 모른다.”
이제 그는 그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강물만 국경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과 배움, 음악과 문자도 국경을 몰랐다. 서로를 이해하려는 뜻만 있다면 모든 언어는 하나의 강물이 되어 흐를 수 있었다.
그는 산티아고 광장 바닥에 연천에서 가져온 작은 돌 하나를 내려놓았다. 돌에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連天.’
이어질 연, 하늘 천.
연천에서 시작된 천 개의 글자가 세상의 하늘과 이어진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글귀를 적었다.
“여덟 자는 한 걸음이고, 천 자는 하나의 길이며, 만 자는 세계로 향하는 다리다.”
원정민은 다시 배낭을 멨다. 산티아고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이제 그에게는 남수단의 아이들과 몽골의 초원, 중국의 연박물관과 일본의 축제, 스페인과 남미의 학교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는 다음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등 뒤에서 세계의 순례자들이 각자의 언어로 외쳤다.
“천지현황, 우주홍황!”
천 개의 글자가 만 개의 소리가 되고, 만 개의 소리가 하나의 꿈이 되어 산티아고의 푸른 하늘로 힘차게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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